풋볼 보헤미안입니다.
쿠알라룸푸르를 떠나기 전, 오래도록 알아온 현지 스포츠 전문 방송국 아스트로 아레나의 피나 나즈롬 기자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말레이시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간판 공격수 파이살 할림이 테러에 희생당한 후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서 자신의 소견을 밝힌다는 정보였습니다. 현지에서는 ‘미키’라는 애칭으로도 불리는 이 선수가 도대체 누구냐 하실 분들이 계실 텐데, 2023 AFC 카타르 아시안컵 한국-말레이시아전에서 기막힌 플레이로 한국 골망을 가른 선수입니다.
득점 장면을 보니 기억이 나실 듯하여 계속 얘기를 진행하겠습니다. 이 선수는 이 경기로 완전히 국민적 영웅이 됐습니다. 말레이시아가 이후 페널티킥을 얻었을 때 손흥민이 심판에 항의하자, 곧바로 손흥민에게 이건 페널티킥이 맞다고 주장하는 장면이 따로 잡히기도 했는데요. 세계적 스타에게 당당하게 할 말 하는 선수라는 이미지까지 얻었고, 결과적으로 한국전 3-3 무승부로 말레이시아가 아시아를 놀라게 하면서 핵심 스타 중 하나로 높이 평가를 받았습니다. 게다가 조호르 다룰 탁짐의 대항마로 꼽히는 슬랑오르 FC의 간판스타이자 충신이라 팬들에게 평소에서도 절대적 지지를 받는 선수기도 했습니다.
아시안컵 이후에는 각종 방송 출연과 광고 촬영을 하는 등 말레이시아 내에서는 슈퍼스타 대우를 받으며 승승장구하고 있었습니다. 김판곤 말레이시아 감독이 걱정이 됐는지 노파심에 광고 촬영 좀 줄이고 축구에 집중하라는 메시지를 따로 전했다고 했을 정도로 정말 엄청난 인기를 누렸는데요. 이 선수가 지난 5월 쿠알라룸푸르 근교 도시 페탈랑 자야의 한 백화점에서 생면부지의 범인에게 염산 테러를 당했습니다. 슈퍼스타이자 축구 영웅에서 선수 생명마저 위태로운 비극적 인물이 되고 만 셈인데요. 이 소식은 한국에서도 크게 조명이 된 바 있습니다.
이날 기자회견은 얼굴을 포함한 온 몸에 4도 화상을 입고 무려 네 차례 대수술 끝에 처음으로 공식석상에 나타나는 것이라 온 말레이시아가 그를 주목했습니다(사족인데, 할림의 수술을 맡은 의사가 한국 한양대 유학파 출신이라고 합니다). 할림은 이 자리에서 “축구 선수로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가족의 안전만큼은 꼭 챙겨달라”라고 간곡하게 말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섣부른 추측은 자제해달라”라며 이번 사건과 관련한 음모론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소개해드리고픈 음모론이 있습니다. 울산 팬들이라면 AFC 챔피언스리그에서 최근 자주 상대했던 팀이라 잘 아실 겁니다. 조호르 다룰 탁짐, 현재 말레이시아에서는 경쟁을 불허하는 최강팀이죠. 엄청난 자금력을 앞세워 자국 스타 선수는 물론 해외에서도 우수한 선수를 싹쓸이해 이런 팀을 만들어낸 것인데요. 실질적인 구단주라 할 수 있는 툰쿠 이스마일 이드리스 말레이시아 조호르주 왕세자가 배후가 아니냐는 지목을 받고 있습니다.
말레이시아에 머물면서 현지 기자들이 차마 기사는 쓰지는 못하지만 제겐 슬며시 얘기를 하더라고요. 모 기자는 툰쿠 이스마일 이드리스 조호르주 왕세자와 텡쿠 아미르 샤 슬랑오르주 왕세자가 굉장히 사이가 좋지 않은 사촌지간이며, 툰쿠 왕세자가 막대한 자금력으로 슬랑오르 에이스인 할림을 영입하려다 할림이 충성심을 발휘하며 이를 거절하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새 시즌 개막이 임박하자 할림에게 사람을 보내 해치우려고 했다는 게 대체적인 골자입니다.
한 팀의 구단주가 경쟁팀의 에이스를 ‘자객’을 보내 선수 생명을 끊어놓으려고 했다는 이 막장 음모론이 현지에서 설득력을 얻는 건, 용의자가 체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법 처리가 전혀 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한국으로 비유해보겠습니다. 손흥민급 인기를 가진 선수가 백화점에 쇼핑을 갔다가 백주대낮에 이런 테러를 당했다면? 아마 나라가 완전히 뒤집혀지겠죠? 당연히 경찰에서도 어떻게든 범인을 잡아 신상까지 공개했을 겁니다.
하지만 말레이시아에선 나라가 뒤집히는 것까지는 됐는데, 용의자로 추정되는 사람까지 체포하고도 실제 구속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렇다 보니 그곳의 축구계와 미디어에서는 암암리에 조호르주의 왕자가 이런 암살극을 벌인 게 아니냐는 말을 흘리고는 있습니다만, 대놓고는 못하는 그런 상황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소문을 퉁쿠 조호르주 왕자가 들었던 모양입니다. 사흘 전 한 팟캐스트에 출연해 이런 인터뷰를 했다고 합니다.
“할림은 좋은 선수입니다. 그는 제게 위협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에게 일어난 일은 정말 비난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사건이 저와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슬랑오르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나요? 제가 할림을 없애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조호르 다룰 탁짐은 작년에 슬랑오르전을 세 번 치러 4-0, 4-0, 2-0으로 이겼습니다. 할림은 그 경기에서 뛰었습니다. 그는 제겐 위협이 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도 참 부끄럽고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런 일을 했겠습니까? 염산 테러는 약한 사람이나 하는 짓입니다. 만약 누군가를 없애려 한다면, 우리는 진짜 철저하게 처리할 겁니다. 그런 일이 저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 어이없는 일입니다.”
“최근에 슬랑오르의 팀 버스가 자카르타에서 공격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것도 제 탓입니까? 모든 게 제 잘못일 수 없잖습니까? 할림은 좋은 사람이며, 위협이 되진 않습니다.”
문제는 이런 심증이 있고, 훗날 물증이 나와도 퉁쿠 왕자를 말레이시아 경찰이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저도 몰랐는데, 말레이시아는 연방 국가이며 각 주 정부를 이루는 주의 왕실이 사실상 권력의 핵심이라네요. 그래서 축구적 관점에서는 대표팀보다는 각 주의 대표라 할 수 있는 클럽이 더 위상이 높다고도 합니다. 이 로얄 패밀리는 사법 처리도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째 할림을 염산으로 공격한 이 사건은 그렇게 유야무야 넘어갈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한국에서 일어나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앞서고, 그 다음에는 한국이었다면 절대 이런 마무리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뒤따릅니다.
어쨌든 할림이 건강하게 피치에 돌아오길 바랍니다. 김판곤 감독은 12일 풋볼 보헤미안과 만난 자리에서 “건강하게 축구 선수로서 복귀한다면 말레이시아라는 나라에 엄청난 원동력이 될 것이며, 국가적 영웅이 될 것”이라며 제자의 조속한 회복과 쾌유를 빌었습니다. 비록 흉터는 남았지만, 정말 축구 선수로 돌아오면 국가적 영웅이자 인간 승리의 표본이 될 듯합니다.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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