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 보헤미안입니다.
링크 하나부터 첨부합니다. 먼저 읽어보시죠.
이 기사, 제가 13년 전에 썼던 겁니다. 최강희 감독을 홍명보 감독으로, 전북 현대를 울산 HD FC로 바꿔서 다시 읽어보세요. 13년 전 기사라는 말이 무색해질 겁니다. 기사 내용 중 규정의 조항 숫자 정도만 제외하면 최근 기사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대한축구협회의 K리그 감독 빼오기의 유구한 전통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2011년 최강희 전북 현대 감독을 대표팀으로 강제로 데려갔던 저 사례가 처음도 아닙니다.
2007년 8월, 대한축구협회는 박성화 당시 부산 아이파크 감독을 2008 베이징 올림픽 대표팀 사령탑에 앉혔습니다. 참고로 박성화 감독은 부산 사령탑에 부임한 지 고작 15일 밖에 되지 않았던 때였습니다. 대한축구협회의 K리그 감독 빼오기는 눈치나 타이밍 같은 것도 보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는 사례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세 사건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부산 아이파크·전북 현대·울산 HD 등 졸지에 감독을 빼앗긴 팀의 팬들이 분노하며 슬퍼했다는 점, 당시에도 이런 사태에 문제점을 제기하는 미디어의 비판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대한축구협회는 고개를 슬쩍 숙이며 “미안하다. 대승적 차원에서 협조해주어서 감사하다”라며 마음에도 없는 사과 한 마디로 퉁치고 넘어갔다는 점입니다.
일어날 때마다 축구계가 뒤집어졌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대한축구협회의 이 막무가내 행동은 왜 되풀이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과거 기사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대한축구협회는 ‘국가대표 축구단 운영규정’에 이 악법을 버젓이 적어두고 있습니다. 이 규정은 제12조 감독 및 코치 등의 선임에 적혀 있습니다. 특히 제2항에 주목하세요.
이번 홍명보 감독의 대표팀행을 두고 이 조항에 대한 팬들의 시선이 몰리고 있습니다. 몇몇 매체는 이 규정을 ‘악법’으로 규정하고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저는 대한축구협회가 스스로 이 규정을 없앨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봅니다. 대한축구협회 처지에서는 감독을 뽑지 못해 전전긍긍할 때 그 상황을 단번에 해결해 줄 ‘치트키’ 아니겠습니까? 무적의 규정인데, 아무렴 스스로 포기할리가 없습니다.
때문에 풋볼 보헤미안은 이 규정 때문에 크게 손해를 보고 있는 이들이 뭉쳐, 반드시 이 악법을 삭제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규정 삭제가 안된다면, 적어도 감독을 대표팀 사령탑으로 데려갈 때 구단과 합당한 이적료 혹은 보상금 협상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조항 정도라도 추가해야 합니다.
이런 목소리를 내야 할 주체, 바로 K리그 구단들과 그 K리그 구단의 이익 대변 단체인 한국프로축구연맹입니다. 이런 사태가 일어날 때마다 K리그에 끼치는 악영향이 정말 심대하다는 것을 떠올리면 반드시 이런 움직임이 일어나야 합니다.
물론 K리그 구단과 한국프로축구연맹 처지에서는 쉽지 않은 일일 수 있습니다. 한국 축구계 전체를 총괄하는 대한축구협회에 반기를 드는 구도이기에 부담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쓸데없이 대한축구협회와 싸움 붙이지마라는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간혹 일어나는 이런 일 때문에 구성원이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있다는 건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저 대한축구협회의 산하단체니까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손 놓을 수는 없는 사안입니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습니다. K리그 구단과 그들의 이익 대변 단체인 한국프로축구연맹은 대한축구협회와 관계보다 그들의 이익과 팬들의 요구에 더 충실해야 합니다. 한국 축구를 위한 대의를 위해 아무튼 협조해야 한다? 아닙니다. 다른 사안은 몰라도, 적어도 감독 빼오기 같은 사안은 수평적 관계에서 협의를 해야 합니다.
다른 나라의 사례를 보면, 우리네 K리그 구단과 한국프로축구연맹은 지나치게 순종적입니다. 협회의 조치에 반대 성명을 내놓는 유럽 클럽 혹은 리그 사무국의 사례가 상당히 많은데, 한국에서는 그런 분위기를 감지하기가 힘듭니다. 최근 십수 년 사이에 이런 경향이 더 심해졌습니다. 2000년대 초·중반만 하더라도 리딩 클럽들이 주도적으로 목소리를 내며 몇몇 정책에 대해 반대 의견을 밝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요즘은 그런 뉴스를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 현장에서는 축구판에 야당이 없다는 말도 나옵니다. 심지어 거수기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입니다. 건강한 토론이 없고, 토론을 주장하면 ‘삐딱이’로 낙인을 찍어버립니다. 그러니 이런 무조건적인 상명하복을 강요하는 이 규정에 대해서도 반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울고 있는 사람 뺨 때리는 것 같아 자제하고 싶었지만 이번 사태의 최대 피해자인 울산에 고언을 드릴 것도 있습니다. 김광국 울산 HD FC는 “홍명보 감독을 우리가 보내주는 것”이라며 마음 아픈 팬들을 달랬지만, 팬들의 공감을 얻지 못했습니다. 당연합니다. 아무리 포장한다고 한들, 팬들은 멀쩡한 감독을 강탈당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사실 팬들을 달랠 게 아니라 협회에 목소리 높여 반발해야 하는 게 정상적 상황입니다.
물론 팬들도 그 이상한 규정 때문에 울산 구단이 이럴 수밖에 없었다는 걸 잘 압니다. 팬들도 울산 구단이 엄연히 피해자라는 것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마 울산 구단도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었을 겁니다. 풋볼 보헤미안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래서 불합리한 상황과 부당한 조건을 반드시 바꿔야 합니다. 추후 울산과 같은 피해를 보는 다른 K리그 구단이 나올 수 있고, 먼 훗날 울산이 똑같은 사례에 또 당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이 규정을 뿌리 뽑아야 할 이유입니다.
K리그 구단과 한국프로축구연맹은 조공을 바치는 존재가 아닙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방관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본인들을 부정하고 팬들의 바람을 외면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홍명보 감독을 둘러싼 이번 사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교훈입니다. 절대 놓쳐서는 안 될 교훈입니다.
풋볼 보헤미안이었습니다.
'풋볼 보헤미안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K리그 팬들에게 용서받는 방법은 대표팀의 성공? 지금 상황에서 그건 홍명보의 성공일 뿐입니다 (0) | 2024.07.29 |
---|---|
또 사고 친 대한축구협회, 기자 조롱 메일 사건 (0) | 2024.07.25 |
홍명보는 없고 대한민국 축구만 남았다? 지금 가장 챙겼어야 했던 건 홍명보였습니다 (0) | 2024.07.11 |
박주호의 용기, 다 정해놓고 거수기 시킬 생각이면 부르지 마세요 (0) | 2024.07.10 |
10년 전 박주영 선발 논란과 ‘의리축구’, 홍명보 감독에게도 필요했던 ‘학습 효과’ (0) | 2024.07.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