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 보헤미안입니다.
박주호의 전력강화위원회 운영 실태에 대한 고백이 엄청난 여파를 낳고 있습니다. 대한축구협회 전력강화위원회 멤버였던 박주호는 지난 8일 자신의 유튜브 채널 캡틴 파추호를 통해 자신도 몰랐던 홍명보 감독의 선임 공식 발표에 깜짝 놀라며 그간 외부에 드러나지 않았던 전력강화위원회의 난맥상에 대해 가감 없이 공개해 팬들을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그러자 대한축구협회는 9일 오후 박주호의 주장에 강하게 반박했습니다. 놀랍게도 국가대표로서 A매치 40경기에 출전하며 헌신했던 레전드 선수에게 법적 조치까지 강구하겠다는 엄포까지 놓아 팬들을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대한축구협회 처지에서는 나름 정말 어렵게 모셔온 새 감독에 대한 정당성을 흔드는 발언이었을테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굉장한 자충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곰곰 생각해봅시다. 박주호는 이번 전력강화위원회에서 소위 ‘이권’과 가장 거리가 먼 인물이었습니다. 대부분 현역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거나, 기술 파트에서 소위 한국 축구계 중심에 가까이에 자리하고 있는 인물들입니다.
지난 2023년 6월 현역 선수에서 은퇴한 지 고작 1년 밖에 지나지 않은 박주호 처지에서는 이 활동을 통해 뭔가 얻을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전력강화위원회 멤버 중 누군가가 “지도자를 안 해봐서 그렇다”라고 그렇다는데, 맞습니다. 그는 아직 관련 파트에서 경험이 없고 그 경험을 쌓으려면 사전에 여러 자격부터 먼저 갖춰야 할 처지입니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박주호는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서 이번 전력강화위원회 활동을 통해 얻을 게 조금도 없습니다.
반대로 이른바 ‘폭로’라는 걸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도리어 손해겠죠. 지금껏 다른 축구인 선배들이 그러했듯 침묵하고 있었으면 중간은 갔을 겁니다. 축구판, 정말 손바닥만합니다. 소위 라인이라는 게 중요하고, 그 라인을 얼마나 잘 타느냐가 현역 이후의 축구인 삶에 엄청난 영향을 끼칩니다. 내부 폭로자 포지션에 선다? 지금처럼 그를 ‘열사’로 여기는 팬들의 지지가 흐릿해지면, 남는 건 배신자를 바라보는 눈초리로 바라볼 일부 축구계 선배들의 삐딱한 평가뿐입니다.
반대로 대한축구협회는, 이번 성명을 통해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허위사실 유포가 아니라 비밀 유지 서약 위반을 근거로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는 태도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대한축구협회가 정말 박주호를 법적으로 대응했으면 좋겠습니다.
스트라이샌드 효과라는 게 있습니다.
팝 가수 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자신의 저택이 담긴 풍경 사진을 두고 사생활 침해라는 이유로 거액의 소송을 걸었다가 도리어 그 사진이 더욱 외부에 유포된 현상을 두고 하는 말인데요. 우리말로 치면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걸 괜히 벌집을 건드려 일을 키우는 어리석은 행동 쯤으로 해석해도 될 듯합니다.
지금 딱 그런 상황이 아닐까 싶습니다. 진실 공방으로 흐른다면 정말 많은 이야기가 나올 텐데, 현재 분위기를 보니 그 얘기를 듣고 싶어하는 이가 정말 많을 듯하네요. 꼭 법적 조치하시길 바랍니다. 아, 그리고 지난 다섯 달 동안 비밀 유지 서약을 어긴 이가 박주호 한 명만은 아니라 그런지, 수많은 이름들이 미디어를 장식한 바 있습니다. 뒤가 아닌 대놓고 말한 박주호 한 명만 잡을 게 아니라 모두 색출하길 바랍니다.
궁색하게 비밀 유지 서약을 트집을 잡은 대한축구협회에 꼭 전하고픈 조언이 있습니다. 박주호의 영상에서 소위 ‘킬 포인트’는 홍 감독의 선임 소식을 전혀 몰랐다는 박주호의 반응입니다. 그 반응은, 홍명보 감독 선임 이틀 전 정몽규 대한축구협회 회장이 그토록 강조했던 ‘절차적 정당성’에 상당한 결함이 있음을 증명합니다.
사실 전력강화위원회에 남은 다섯 명의 위원에게 임의로 감독을 선택하겠다는 걸 동의를 받았다는 이임생 대한축구협회 기술총괄이사의 말부터가 말이 안 됩니다. 전력강화위원장이든 대행이든 위원들의 일임을 받아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면 이렇게 5개월이라는 시간을 끌 이유가 전혀 없으니까요. 풋볼 보헤미안은 이렇게 쉽게 뽑을 감독이었는데 왜 그렇게 시끄러운 다섯 달을 보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외부에 정보 노출이 되는 게 두려웠다? 그걸 자의적으로 판단하는 것부터가 문제가 아닐까요? 홍명보 감독을 뽑으려고 했다면, 적어도 전력강화위원회를 한 번 더 소집해 제대로 된 절차를 거쳐 추인했어야 합니다. 그래야 박주호처럼 갑작스러운 소식에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이가 나오지 않을테니까요.
또 한 가지, 이런 난맥상이 전력강화위원회에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지난해 3월 승부조작 사면 시도 사건 당시 이사회가 해체된 바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사회를 구성했던 대부분의 멤버들은 억울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대로 된 공지 없이 다들 현장에서 접하고 시쳇말로 ‘어어~’ 하다 가담한 꼴이 되었으니까요.
그 상황에서도 재빠른 대응을 한 이는 의로운 이가 되었고, 본의든 아니었든 그 분위기에 눌려버렸던 이는 비겁한 일에 가담한 악인 꼬리표를 달고 말았습니다. 사실 이사회는 한국 축구를 위한 건강한 제언이나 치열한 토론이 이뤄질 수 없는 공간이었습니다. ‘누군가’가 결정한 일을 승인하게끔 하는 장치였을 뿐입니다. 이사들을 거수기로 만들고 그들을 통해 뭔가 하려는 요식적 절차에 불과했다는 겁니다.
대부분의 이사들은 그때 사면 번복 후 책임을 지고 총사퇴하며 책임을 졌는데, 정작 그 일을 주도적으로 진행한 집행부들은 대부분 그대로 남았습니다. 지금이야 다 끝난 얘기가 되었지만, 그때 몸담았던 많은 이사들이 졸지에 ‘한국 축구의 해악’으로 낙인이 찍혀버렸던 그 상황에 대해 강한 불만을 품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연한 반응입니다. 전력강화위원으로 활동한 박주호처럼, 그들 역시 한국 축구에 보탬이 되고 싶어 이사 제안을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구도 거수가가 되고 싶은 이는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누구도 승부조작 사면에 찬동한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은 없었을 겁니다. 그랬던 분위기, 어째 지금 전력강화위원회와 비슷하지 않나요?
이런 식으로 할 거면 그냥 정몽규 회장과 집행부가 대놓고 협회를 사유화하는 게 뒷말이 나오지 않을 듯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번 힘을 보태겠다고 나섰다가 상처받고 판을 떠나고 있습니다. 어차피 결론을 내린 사안이라면, 괜히 그들을 불러서 거수기 세우지 마시길 바랍니다. 다들 바쁘고 귀한 사람들입니다.
풋볼 보헤미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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