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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데라 야스히코의 이미지 컷 ⓒ 분데스리가 홈페이지

풋볼 보헤미안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한국 그리고 아시아 축구 선수들의 유럽 진출 도전사에서 첫머리를 장식하는 선수는 ‘차붐’ 차범근일 것입니다.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 바이엘 04 레버쿠젠에서 활약하며 두 차례 UEFA컵 우승을 거머쥐고, 한때 분데스리가 외국인 공격수 득점 랭킹 1위까지 찍었던 차범근의 성공신화는 개인의 성취가 아닙니다. 유럽 클럽들이 또 다른 차범근을 발견하기 위해 아시아로 눈을 돌리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성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차범근보다 2년 빨리 유럽의 문을 두드려 성공을 거둔 아시아 선수가 있었습니다. 바로 일본의 오쿠데라 야스히코입니다. 차범근이 현역으로 활약하던 시기에 분데스리가 한일전이 벌어질 때마다 늘 차범근의 라이벌로 조명되던 인물이죠.
 
오쿠데라를 상대한 차범근이 늘 최고의 활약을 펼쳤기에 한국에서는 그저 라이벌전에서 분루를 삼키던 이미지가 강한 선수지만, 그래도 이 선수가 지니는 의미도 대단합니다. 분데스리가에서 우승까지 맛봤던 오쿠데라의 사례는 차범근이 “나도 할 수 있다”라며 유럽 진출을 강하게 열망하던 동기 부여 요소가 되었으니까요. 그래서 이번에는 오쿠데라의 이야기를 소개해볼까 합니다. 오쿠데라는 오쿠데라 나름대로 위대한 개척자의 길을 밟아온 인물입니다.
 

후루카와 전기 시절 오쿠데라(오른쪽) ⓒ일본 축구전문지 사커 매거진

 
큰 바다로 나아갈 기회를 잡은 우물 안 개구리
 
일본어에는 ‘井の中の蛙大海を知らず’라는 관용구가 있다고 합니다. 한글로 풀이하자면, 우물 안 개구리는 큰 바다를 알지 못한다는 뜻이죠. 좁은 세상에 갇힌 좁은 시야를 가진 이들을 두고 한국에서는 우물 안 개구리라고 하는데, 역시 사람이 생각하는 건 여기나 저기나 비슷한 것 같습니다.
 
어쨌든 1970년 후루카와 전기(현 제프 유나이티드 이치하라 치바)에서 아마추어 선수로 활동하던 오쿠데라 역시 그 시절에는 우물 안 개구리였습니다. 지금이야 세계에 내놓아도 부족함이 없을 일본의 인프라와 선수 육성 시스템이지만, 그때는 한국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열악했던 시절이었죠. 축구 인기도 시원찮은 시절이라 더욱 어려웠습니다. 재능이 있어 일본 국가대표로도 선발될 정도로 명성을 쌓아갔던 오쿠데라였지만, 아마추어 축구 선수로는 생계를 책임질 수 없었습니다. 오쿠데라는 생계를 위해 전기 회사에서 일하다 주말에만 축구 선수로 활동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그에게 일생일대 기회가 찾아오게 됩니다.
 
1977년 니노미야 히로시 감독이 이끌었던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이 독일 전지훈련을 추진했습니다. 일본 축구의 성장을 도모하기 위한 전지훈련이었는데, 단순히 훈련하고 평가전을 가지는 것에 그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니노미야 감독은 일본 선수들을 독일 곳곳에 보내 분데스리가 클럽에서 연습생 신분으로 훈련하도록 했습니다. 물이 다른 곳에서 뭔가 배우고 돌아오라는 일종의 견학 기회를 제공한 셈인데요. 이때 FC 쾰른으로 향했던 오쿠데라에게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 옵니다. 헤네스 바이스바일러 당시 쾰른 감독의 관심을 끌어 정식 계약을 제안받은 것입니다.

쾰른 선수가 되다 ⓒ FC 쾰른 홈페이지

 
독일 진출을 주저한 이유
 
바이스바일러 감독은 독일 축구사에 길이 남을 명장 중 하나입니다. 유프 하인케스, 귄터 네처, 베르티 포크츠 등 1970년대를 수놓았던 독일 축구 스타들을 발굴한 인물인데다, FC 쾰른에서는 가히 클럽의 상징으로 여겨질 만큼 엄청난 위상을 가진 지도자입니다. 심지어 FC 쾰른의 그 유명한 염소 마스코트의 이름 역시 헤네스입니다. 염소들이 대를 이어가며 헤네스의 이름을 잇고 있죠.
 
잠깐 삼천포로 빠졌는데, 이런 바이스바일러 감독에게 직접 제안을 받았으니 얼마나 기뻐했을까요? 하지만 정작 제안을 받은 오쿠데라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만약 계약서에 사인하게 된다면 오쿠데라는 일본 축구 역사상 최초의 프로 선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모름지기 모든 일의 첫 번째는 영광스러운 자리지만 그만큼 실패할 수도 있다는 부담이 큰 법입니다. 어린 선수라면 부담 없이 도전해볼 법한 일이지만, 그때 오쿠데라는 25세였습니다. 일본에서 보내던 안정적인 삶을 포기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둘째, 무엇보다 그의 가족들이 분데스리가 도전을 만류했습니다. 후루카와 전기에서 안정적인 수입을 벌어다 주던 가장이 가족과 직업을 내려놓고 독일로 떠나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후루카와 전기도 축구 선수 이전에 유능한 사원이었던 오쿠데라를 보내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일본축구협회와 FC 쾰른의 간곡한 설득 덕에 오쿠데라는 독일로 떠날 수 있었습니다.

데뷔 시즌 쾰른의 더블 멤버가 된 오쿠데라 @FC 쾰른 소셜 미디어

 
쾰른의 영원한 레전드가 되다
 
그렇게 오쿠데라는 FC 쾰른의 두 명의 외국인 선수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독일 적응은 순탄하지 않았던 듯합니다. 아마추어에서 프로 레벨로 뛰어오른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심지어 세계 최고 무대인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뛰어야 했으니까요.
 
처음만 하더라도 오쿠데라는 주변에서 볼을 달라는 동료에게 패스를 넘기기에 급급했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자신의 기량을 펼치는 법을 몸으로 깨우쳐가며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오쿠데라는 1977-1978 시즌 24경기에 출전해 6골을 성공시키는데요. 특히 시즌 마지막 두 경기에서 연속 골을 터뜨리며 쾰른이 클럽 역사상 두 번째 분데스리가 우승을 이루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참고로 이 우승은 현재 쾰른이 기록하고 있는 마지막 분데스리가 우승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DFB포칼까지 우승했으니 ‘더블’입니다. 쾰른의 영원한 레전드가 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죠.
 
그리고 이듬해 1978-1979 시즌 유로피언컵 준결승 진출에도 기여합니다. 오쿠데라는 당대 최강이었던 노팅엄 포레스트를 상대한 준결승전에서 골을 기록하는데요. 이 골로 아시아 선수 사상 최초로 유럽 클럽대항전에서 득점을 한 선수라는 기념비적 타이틀을 가져가게 됩니다.

베르더 브레멘에서 또 다른 전성기를 보냈다 ⓒ 브레더 브레멘 홈페이지

오쿠데라는 이후 헤르타 베를린과 베르더 브레멘에서 자신의 커리어를 이어갑니다. 오토 레하겔 감독이 이끌었던 베르더 브레멘은 1982-1983 시즌부터 1985-1986 시즌까지 3년 연속 준우승을 차지하며 분데스리가를 대표하는 강호로 우뚝 섰는데요. 이때 오쿠데라도 주전 풀백으로 활약하며 팀에 기여했습니다. 1977년부터 1986까지 약 10년 동안 오쿠데라는 시즌마다 최소 20경기 이상 출전하며 분데스리가에서 실력파로 인정받으며 성공적인 선수 생활을 했습니다. 당시 독일팬들은 정확한 킥 실력을 자랑했던 오쿠데라를 두고 ‘동양의 컴퓨터’라고 찬사를 보냈습니다. 확실히 동 시대를 뛴 차범근과 더불어 박수 받을 만한 커리어를 밟은 선수였죠. 다만 차범근이 더 화려하게 빛났다는 게 오쿠데라에게는 아쉬운 일이었겠지만요.

1986시즌 일본축구리그 개막 포스터에 등장한 오쿠데라, 이해부터 일본은 프로 선수의 선수 등록을 점진적으로 시작했다. ⓒ 일본축구협회

 
샐러리맨의 축구시대는 끝났다
 
오쿠데라는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귀국해 1년을 더 뛰고 현역에서 은퇴했습니다. 독일 진출 후 10년 동안 함께 하지 못했던 일본 축구 국가대표로도 다시 활동했으며, 실업팀이었던 후루카와 전기가 1987년 AFC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현 AFC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할 때도 기여했습니다. 참고로 후루카와 전기의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우승은 일본 클럽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 클럽대항전 우승입니다.
 
오쿠데라는 은퇴 후 축구 감독보다는 행정가로서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은퇴 즈음해서는 이른바 “샐러리맨의 축구시대는 끝났다(サラリーマンサッカーの時代は終わった)”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앞세워 일본 J리그 출범을 위한 분위기를 조성할 때 선봉장 구실을 하기도 합니다. 이 문구는 실업 리그 상태였던 일본 축구 전국리그의 포스터에 새겨진 문구인데요. 샐러리맨의 축구, 즉 완전한 프로가 아닌 세미프로의 시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이 문구를 통해 일본 역시 프로 축구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에 당대 최고 스타였던 오쿠데라가 힘을 실어준 것입니다.

요코하마 FC이 회장으로 활동한 오쿠데라와 박지성의 절친으로 유명한 마쓰이 다이스케 ⓒ 요코하마 FC

은퇴 후 그의 가장 큰 작품은 요코하마 FC 창단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1998년 전일본공수가 요코하마 프뤼겔스 운영을 포기하면서 팀이 요코하마 마리노스로 합병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요코하마 마리노스의 팀명에 F가 자리한 이유이기도 한데요.
 
졸지에 팀을 잃은 요코하마 프뤼겔스 팬들이 뜻을 모아 만들고자 한 팀이 바로 요코하마 FC입니다. 오쿠데라는 이 팬들과 힘을 합쳐 요코하마 FC 창단에 기여했으며, 회장으로서 활동했습니다. 자신의 쾰른 시절 동료인 독일 레전드 피에르 리트바르스키를 감독으로 데려오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후 경영권 지분이 넘어가면서 사실상 구단 운영에 손을 떼기도 했습니다만, 어쨌든 오쿠데라의 인생은 일본 축구가 한국과 더불어 아시아 축구 최상위권 국가가 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것만큼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 분데스리가에 엄청나게 많은 일본 선수들의 길을 오쿠데라가 닦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상 풋볼 보헤미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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